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로마이단 혁명 (문단 편집) == 러시아의 개입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danzcolor5811.jpg|width=100%]]}}}|| || '''미스터 푸틴이 유럽연합에게 다가가는 우크라이나를 막다'''[br]푸틴: 자, 우리 러시아인들은 경제 정책의 사소한 차이점 때문에 오랫동안 이어져온 의리를 절대 버리지 않소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Ukraine-and-Russia.jpg|width=100%]]}}}|| || 아직도 내 전처는 소유욕이 좀 강해서... || >'''데니킨[* [[안톤 데니킨]]은 제정 러시아의 장군으로, 적백내전 때 백군의 편에서 싸웠다. 데니킨은 생전 우크라이나 전선에 대한 서방국가의 개입에 반대하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를 '''[[대러시아]]와 [[소러시아]]'''의 관계로 표현했다.]은 우리들(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에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 제국주의|이는 오직 러시아의 권리다]].'''[br]'''블라디미르 푸틴''', 2009년 데니킨이 안장된 돈스코이 묘지를 참배 도중. >'''우리는 더이상 형제가 아닐 겁니다.'''[br]유로마이단에 참가한 어느 시민의 시 중.[[https://www.youtube.com/watch?v=Qv97YeC563Y|출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형제'라는 애국주의적 인식을 바탕으로 우크라이나를 주무르려는 러시아를 비난한 것. 워낙 감정적으로 민감한 소재인지라, 양국 시민들의 치열한 키배가 일어났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옛 소련 국가들을 고르바초프가 구상했던 신연방조약과 같이 [[독립국가연합]]으로 재편성하려 했던 러시아의 시도는 [[신자유주의]]로 경제개혁이 좌절되면서 처참하게 실패했다. 동유럽 국가들과 옛 소련 국가들은 '''자신들의 압제자였던''' 러시아를 벗어나 서구권에 빠르게 편입되었고,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 러시아에 반감이 심했던 폴란드나 발트 3국같은 나라들은 '''EU와 NATO에 가입하면서''' 러시아에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특히 [[1999년]] 안보리에서의 러시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NATO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진 [[코소보 전쟁|베오그라드 공습]]은 러시아 입장에서 자신의 옛 [[세력권]]에 대한 서방의 패권행사 그 자체였고, 이는 러시아가 서방에 반감을 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1991년 소련 붕괴로 독립을 맞은 우크라이나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국가'''로서 독립적인 정책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오랜 시절 동안 몽골, 폴란드, 크림 칸국,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홀로도모르|많은 시련]]을 감당해야 했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러시아가 과거든 미래든 언제든 다시 자국을 '''보호국 내지 [[위성국]]'''으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기존의 러시아 의존적인 사회구조를 탈피해 서방과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는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지방정도로 인식하고 있던 러시아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었다. 비록 러시아와 서방은 '''공식적으로는''' [[1989년]] 몰타 회담 이후 서로 협력 관계였지만, 서방과 러시아 모두 서로의 이해가 달랐다. 특히 냉전 이후 정치와 군사, 경제 등 전 분야에서 서방이 러시아를 압도하는 상황에서, 러시아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력권 구축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특히 2000년대 후반 남오세티아 전쟁 등으로 러시아는 자신의 세력권을 다시 구축하려 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서방과 가까워지는 것을 방해해 왔다. 특히 2010년대 초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어떻게 해서든 자국의 영향력에 두고자 했고, 이를 위해 우크라이나 내 친러세력의 기반이었던 야누코비치 정권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야누코비치는 대통령 집권 이후 자신과 가장 치열하게 맞섰던 경쟁자인 [[율리야 티모셴코]]를 살인누명으로 투옥시키는 '''초대형 악수'''를 두었고,[* 이게 왜 악수인가 하느냐면, 티모셴코가 친서방 세력을 대표하는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개혁세력에게 단지 경각심 차원을 넘어 큰 악영향을 미쳤다. 특히 야누코비치 정권에 꾸준히 제기되던 부패 의혹과 권위적 통치는 국민들의 신뢰를 대폭 떨어뜨렸다. 한편 유라시아 경제연합 등으로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세력권 편입이 코 앞에 있던 찰나에, 야누코비치 정권이 '''붕괴'''하면서 친서방세력이 우크라이나 중앙정부를 둘러싼 권력투쟁에서 완전히 '''승리'''했다. 정확히 말하며 원래 동부 지역은 친러 경향이 높았지만, 러시아가 사태에 개입하여 [[돈바스]] 반군에 물자와 병력을 지원하고 심지어 직접 군사행동까지 벌이자, 원래부터 반러 성향이 강했던 서부뿐만 아니라 일종의 [[나이롱]] 친러였던 동부마저 점령지만 빼고 죄다 반러로 돌아서버린 것이다. 그리고 친러 세력은 러시아로 피난가거나 돈바스로 가거나 아니면 아예 편을 바꿔버리고. '''이제 우크라이나가 평화적, 자의적으로 러시아 품안에 돌아올 가능성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사실 러시아는 이 사태가 발생하고서도 본격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2014 소치 동계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켰다가, 미국의 반발로 반쪽짜리 올림픽을 개최했던 일이 있었다 보니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러시아는 소치 동계올림픽이 끝날때까지는 참고 있다가, 올림픽이 종료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에 개입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